[책임] 형법상 책임의 의미
내가 지금의 너만한 아이였을 적에, 나에게는 만년필이 없었다. 돈이 없어 그걸 사지 못한 게 아니다. 나는 너무 어려서 만년필을 사용할 자격이 없었던 거다. 어린 것들은 연필로 글씨를 써야 한다는 게 어른들의 생각이었다. 연필은 글씨를 썼다가도 마음대로 지울 수가 있는 필기도구다. 하지만 만년필 글씨는 한 번 쓰면 더 이상 고칠 수가 없다. 다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소리다. 글씨도 삶도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만년필을 쓰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 안도현, 「만년필 잉크냄새」, 『사람』, 이레, 33쪽
○ 책임의 중요성
만년필 글씨를 한 번 쓰면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일어난 일도 다시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행동을 하기 전에는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아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책임 없으면 형벌 없다.”라는 법언(法言)이 보여주는 것처럼, 책임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형법에서도 중요합니다.
○ 형법상 책임의 의미
책임은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에 이은 세 번째 범죄성립조건입니다. 특정한 행위가 구성요건에도 해당하고 특별한 위법한 조각사유도 없어서 위법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할지라도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책임’이라는 요소까지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책임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인데 형법적인 의미는 다소 다릅니다. 범죄의 성립 조건으로서의 책임은, ‘위법한 행위에 대하여 행위자를 탓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즉 “법에 금지하고 있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왜 그러한 위법한 행위를 저질렀는가”라고 행위자를 비난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처벌을 가하는 것도 합당하다고 판단될 때 책임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책임 개념은 인간이 자유로운 의사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이 자유의사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문제이기는 하나, 형법적으로도 논의가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자유의사를 부정하며 범죄는 행위자가 본래 타고난 성질이나 사회적 환경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행위자에게 그 비난을 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일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이 타고난 성격이나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이 절대적이거나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에게는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경우에는 행위자에게 책임이 없어 행위자를 탓할 수도 없고 처벌도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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